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전초전 ==== 장안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맨 먼저 움직인 것은 관내절도사 왕사례였다. 왕사례는 무공에 진을 치고 병마사 곽영예와 왕난득을 동서로 늘여세워 교전을 건다. 그러나 왕사례는 안수충의 공세에 패배, 부풍으로 물러난다. 당군은 첫 교전에서 패배를 당한 것. 전초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당숙종은 마지막 인선을 고심하고 있었다. 천하병마(天下兵馬)부원수직을 누구에게 내리냐는 것. 광평왕 이숙이 황제의 적장자로써의 권위가 존재하긴 하나 군 경력이 일천하므로 형식상의 총사령관의 위치라는 것은 명백한 이상 천하병마부원수직은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써 군을 지휘해야만 했다. 결국 당숙종은 4월, 그 인물로 '''[[곽자의]]'''를 선택, 사공·천하병마부원수직에 임명하고 봉천으로 부른다. 곽자의가 선택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광필은 태원에서 사사명을 방어해내고 있었고, 노경이나 하란진명은 권위가 부족했으며, 왕사례는 동관에서나 무공에서처럼 군재가 충분하다고 보긴 힘들었다. 결국 757년 당시 62세로 가장 연장자이자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그 직함도 가장 높은 편인 곽자의야말로 대반격의 총사령관으로써 적절한 인재였다. 당숙종의 명을 받고 곽자의가 봉천으로 이동하자 안경서군의 일원인 이귀인이 철갑으로 무장한 [[중장기병]] 5천여 기로 삼원(섬서성 삼원현 도욱)에서 곽자의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곽자의는 복고회은, 왕중승, 혼석진, 이약유와 함께 유운교로 끌어들여 이귀인의 기병대를 격파한 후 봉천으로 들어간다. 봉상에서 곽자의는 이전까지 군을 지휘하던 왕사례와 서위교(섬서성 함양시 서남)에서 합류, 장안성 서남쪽을 흘러가는 위수의 지류인 휼수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5월 6일 안수충과 벌어진 교전에서 곽자의는 안수충의 거짓 퇴각에 속아 전진했다가 장사진을 친 기병 9천여를 양익에 늘여세워 양면공격을 가한 안수충에 의해 패배했다. 이 패배는 곽자의가 직접 지휘한 전투 중 최초의 참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판관 한액과 감군 손지고가 사로잡히고 각종 군사물자를 상실하는 피해를 입어 무공까지 철수한다. 곽자의는 이일로 스스로 벼슬을 깎아달라 청원하여 [[좌복야]]로 좌천되었으나 천하병마부원수직은 유지했다. 8월 26일, 어사대부 최광원이 낙곡에서 연군을 격파한다. 이후 행군사마인 왕백륜과 판관 이춘은 2천명을 거느리고 함양시 동부의 중위교를 공격해 천여명을 살상하고 장안까지 나아가 원문에 도달했다. 이에 봉상의 당군을 방어하던 무공의 연군이 후방으로 돌아가 이를 격파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당군이 무공을 장악하면서 장안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던 연의 마지막 방위선은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